박강희

〈A에 대하여〉

웹사이트, 가변크기, 2024.

작업 설명

인터랙티브 웹사이트 형식의 〈A에 대하여〉는 대상 A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 작업이다. 대상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우리는 대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또 모순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 대상을 말하는 것에 언제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면, 〈A에 대하여〉는 그 아이러니를 통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참여자가 입력한 ‘아니다.’를 통해 단정하지 않고 끝없이 ‘다르게’ 말하며 A에게 다가간다.

작업 기록

1.
오키나와로 떠난 여행의 둘째 날 밤, 웹진 비유에 〈나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라는 제목으로 소설가 정지돈의 단편 소설이 올라왔다. 숙소 1층에서 루루는 일찍이 잠들어 있었고, 나는 새벽에 그걸 정신없이 읽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를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지 않았어요. 그는 새로운 구분선을 긋습니다. 그가 저항했던 것은 이른바 ‘양질의 문학(Quality liy)’이었습니다. 논리정연하고 완성도 높은 양질의 문학과 자기모순적이고 가변적인 저질 문학(Low lit). (…) 저질 문학적 흐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것들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들은 어디에서나 틈을 찾아 모습을 드러내고 싹을 틔웁니다. 자본주의 내부에서, 신자유주의 내부에서, 민주주의 내부에서, 공산주의 내부에서, 구조주의 내부에서, 페미니즘 내부에서, 퀴어이론 내부에서, 식민주의의와 탈식민주의 내부에서 배제당하는 것들을 구제합니다… … 저질 문학은 일종의 안티테제, 반문화일까요. 지금 저는 지긋지긋한 이분법을 반복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저질 문학은 반대항이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반대의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양질의 문학, 우리가 주도적으로 경험하는 문화가 바로 반대항이라고요. 저질 문학이 자연의 질서고 우주의 근본 원리이며 여기에 저항해서 인간들이 세운 폭력적인 체계가 바로 지금의 문화인 것이죠.1

이번 학기에 수강한 ‘소리탐험’ 수업에서, 음향학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배웠다. 음향학에는 Q값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은 퀄리티를 가리킨다. 우리는 사운드 프로그램을 통해서 Q값을 조절함에 따른 소리의 변화를 경험했다. Q값을 낮추면 시끄럽고 정제되지 않은 잡음이 꼈다. Q값을 높이면 잡음이 다 지워지고 깨끗한 소리가 났는데 소리 자체가 약해졌다. 크게 듣기 위해 게인을 올리면 다시 소리에 잡음이 낀다. 류한길 스승은 퀄리티를 낮춰야 정보량이 많아지고 질량이 확보될 수 있다고 말했다. Q값, 그러니까 퀄리티를 낮춘 글, 깎아내고 정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순적이고 계속해서 가변하지만 그래서 어쩌면 그 무엇도 배제하지 않는 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어디서나 싹을 틔우는 글. 그런 글을 나는 쓸 수 있을까.

2.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은 모두 글을 썼고 그것들은 전부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쓰였다. 나 역시도 나와 사랑하는 친구들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여기 있다고, 우리를 말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언젠가부터 그것에 불가능성을 느꼈다. 우리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복잡하고 또 모호한 존재인지를 감각할 뿐이었고, 우리의 모순됨을 설명하기에 내가 가진 언어는 너무 부정확하고 부족했다.

3.
글쓰기를 지도해준 강보원 스승은 대상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다고, 대상에 대해 쓸 때 그 아이러니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상반되거나 충돌하거나 모순될지라도 함께 써야 한다고, 글쓰기는 어려움 속에서 해야 한다고 그가 말한다. 대상을 말하는 것에 언제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면, 나는 그것을 통과하는 과정을 작업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대상을 단정하지 않고 끝없이 ‘다르게’ 말하며 대상에 다가가는 작업이 되길 바랐다. 대상을 다각도적으로 말하려는 시도. …그러나 이 작업 역시도 어느 관점에서는 완벽하게 실패했음을 알았다. 개의치 않기로 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2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소설은 그 형태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우연적인) 이유가 있다. 작가는 어떤 한계에 의해서 그렇게 쓴다. 다시 말해 소설이 특정 형태가 되는 것은 결단이 아니라 포기에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해낸 것보다 해내지 못한 것을 봐야 한다고3 정지돈은 썼다. 작업이 해낸 것보다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우리들의 실패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하며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1.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56쪽
  2.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1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