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연.열매

〈그냥. 좋은 것.〉

유리, 전자기판, 종이, 청테이프, 가변크기, 2024.

작업 설명

‘그냥 좋은 것’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목적 없음의 두려움과 즐거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냥’에 대한 모호함을 목록화하고 그 규칙에 부합하는 것들을 탐색했다. 기능도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냥 좋아서 모아온 오브제들을 풍경으로 보이도록 나열하고, 한 달 동안 목표 없이 그냥 반복한 작업을 소개한다. 관객들에게 목적 없이 그냥 무언가를 반복해보는 경험을 통해 각자의 ‘그냥 좋은 것’을 떠올려보기를 권한다.

작업 기록

그냥. 좋은 것.

1.
유용과 무용. 그것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 가령, 예술, 작업에 대해서. 무엇이 될지 불분명한 작업은 실체 없음에 대한 막연함이 있다.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즐거움이 있다. 쓸모있는 것을 만드는 것은 명확하게 재화가 될 것을 목표로 하지만 기대에 불과하다.

2.
정말 쓸데없는 것들을 모으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 즐겁다. 모으는 행위, 모은 것을 나열하는 행위, 들여다보는 행위는 즐겁다. 그러나 재미의 밀도만큼 쓸데가 없다는 생각의 밀도도 높아서 허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3.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 예상치 못했던 걸 보게되고, 그걸 따라가 보는 거죠. 재미로 이것저것 해보기도 하고, 실제로 재미있으면 모두가 신이 납니다. 그냥 “재미”로 해봤다고 하는 거예요. 엄청나죠.1

4.
‘그냥’이라는 말이 싫었다. 나에게는 거절, 거부, 귀찮다, 하찮다는 표현에 가깝다. 무책임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좋다. 그냥 즐겁다. 그냥 기쁘다는 왠지 어법에 맞지 않는 말로 들린다. 많은 작업자들에게서 ‘그냥’ 이라는 표현을 자주 목격했다. 궁금하다. 나는 ‘그냥 좋은 상태’를 정확히 표현해 낼만한 경험이 없다. 그냥 좋다.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좋다는 뜻일까. 아무 생각 없이 작업하는 그 행위의 시간이 좋은 것일까. ‘그냥’이 나에게 긍정적인 표현으로 자연스러워지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내가 누군가에게 그냥 좋아.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이 작업을 설명할 때 그냥 좋아서. 라고 신나게 말할 수 있으려면 얼마의 반복이 필요할까. ‘그냥 좋다’의 나만의 조건은 무엇일까.

5.

< ‘그냥 좋은 것’을 만족하는 조건>

  1. 단순한 행위여야 한다.
  2. 배열되는 것들이 나의 미감(색의 조합, 단순한 형태 등)을 만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3. 단순한 행위의 반복만으로 원래의 형태, 기능이 달라진다.
  4. 배열, 나열, 정렬, 정돈되어있어야 한다.
    - 결과물에서 규칙(패턴)이 읽혀야 한다.
  5. 유사하거나 동일한 형태, 소재가 모여야 한다.
  6. 규칙이 있어야 한다.
  7. 손 또는 몸을 도구로 하는 아날로그 방식이어야 한다.

< ‘그냥 좋은 것’의 상태 또는 기대하는 상태>

  1. 결과물에 도달했을 때의 성취감
  2. 몰두하는(도피하는) 기쁨
  3. 규칙(구속) 속에 머물러 있다는 안정감.

6.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는 기원하는 마음을 생산한다. 오늘 하루의 무탈함을 기원하게 되고,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기를 기원하게 된다. 잠깐의 몰입과 움직임이 기원의 값을 치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7.
그러므로 ‘그냥’ 작업할 수 있는 환경. ‘반복’의 행위를 단 10분이라도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갈망한다. 몰입할 수 있는 상태, 조건을 갈망한다.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으며 방해를 받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몰입 자체를 존중해줄 수 있는 환경을 갈망한다. 그 환경이 지속되기를 갈망한다. 그것은 어떠한 보상을 위해서도 아니고, 자의식에 의해서도 아니고,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결과물을 도출해내기 위한 목적이 아닌것. 그저 그 시간인 것. 그 시간에 집중하는 것.

8.
무엇이 되지 않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쓸데없는 것, 잉여의 시간, 생각 없이 반복하는 행위는 아직도 막연하다. 그러나 즐거운 상태, 있는 그대로 상태가 좋은 것이 흐릿하더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냥 좋은 것을 여과 없이 목적 없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배치시켜 그냥 좋은 시간을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수집해 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막연함도 있는 그대로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1. 피터 밀러 《예술가의 리서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