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호

〈서바이벌 타입〉

에어캡, 테이프, 골판지, 가변 크기, 2024.

작업 설명

〈서바이벌 타입〉은 폐허가 된 세상의 글자들을 상상하고 실험한 작업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기, 통신 등 도시의 모든 제반 시설이 마비된 재난 상황을 가정하고, 가상의 인물들이 각자 어떤 심리와 제약 속에서 글자를 사용하게 될지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거리에 나뒹구는 비닐과 쓰레기는 종이를 대신하게 되고, 무한대로 생산되던 글자는 경제성을 고려하게 된다. 대체 필기도구는 글자에 낯선 형태와 질감을 부여하고, 파편적 소재 사용으로 모듈화된 글자가 등장한다. 폐허라는 특수한 상황과 제약 속에서 어쩌면 글자는 지금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작업 기록


2024. 3. 20.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를 본 후로, 세상이 곧 ‘폐허’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영화는 어느 날 도쿄 전역의 모든 전기가 끊기고, 교통, 수도, 가스 등 모든 도시 제반시설이 마비된 상황을 그린다. 며칠만 참으면 될 줄 알았던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고 도시는 점점 폐허로 변해간다. 회사와 학교도 갈 수 없고 식량은 떨어져가며 마실 물을 구하기도 어렵다. 평범한 스즈키 가족은 도쿄를 떠나 시골에서 자급자족 하는 할아버지네로 향하고, 그 과정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보여준다. 영화는 가족의 상황을 시트콤처럼 가볍게 그려내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가볍지만은 않았다.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자연재해. 폐허가 된 세상이 가까운 미래처럼 느껴진다.


2024. 3. 27.
그렇다면 폐허가 된 세상에서 글자는 어떤 모습을 하게될까? 특정 상황으로 인해 생긴 제약들은 글자를 사용하는 방식도 바꾼다. 종이가 없어서 비닐에 적는다거가 돌에 글자를 새긴다거나? 가까운 미래처럼 느껴지는 폐허와 글자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다.

- 키워드 : 글자
- 질문 :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사용될 글자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와 같은 상황에서 가상의 4인 가족이 어떤 심리와 제약 속에서 글자를 사용할 지 구체적으로 정한다. 이 때 설정한 시공간과 재난상황은 글자에 대한 상상과 실험을 위한 ‘조건’이 된다.


2024. 5. 1.
[ 재난 상황에서의 글자가 가지게 될 특징 ]

1. 종이를 대체하는 소재에 적응한 글자
종이부족으로 거리에 버려진 비닐, 천조각 등이 종이를 대신하게 된다.

2. 경제적 글자 / 최소한의 글자
한정된 필기도구를 최대한 아껴 써야하므로 글자의 경제성이 극대화된다.
구현 : 글자의 아웃라인만 남긴다. 읽히도록 하는 최소한의 획만 남긴다. 점선으로 쓴다. 작게 쓴다. 초성만 남긴다. 획의 시작과 끝 부분만 표시하고 심리적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3. 형태가 왜곡되는 글자, 질감을 가지는 글자
주변의 모든 사물이 대체 필기도구가 되면서 글자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새로운 질감이 부여된다.

4. 모듈화된 글자
파편적 재료의 사용으로 모듈글자의 특징을 가지게 된다.

5. 기호화 / 아이콘화 된 글자
기존 글자, 줄임말보다 더 빠르게 전달 가능한 함축적 형태를 사용한다.


2024. 5. 15.
[ 가상의 가족과 예상되는 상황설정 ]

아빠
구조될 거란 희망을 놓치 못한 상태. 거리에 넘쳐나는 에어캡에 구조 요청 문구를 넣어 깃발처럼 달아 놓는다. 다른 나라에서 원조팀이 올 지도 모르므로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도 넣는다.

엄마
미신을 믿으며 부적을 만든다. 병뚜껑, 포크, 나사 등 주변의 쓰레기들을 대체 필기도구로 사용한다.

중학생 딸
집을 떠날 때 가져온 작은 일기장에 모든 일들을 기록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펜 잉크가 점점 줄어들어 아껴써야 하는 상황. 최소한의 글자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글자는 점점 암호화 되어간다.

초등학생 아들
한글쓰기 연습을 많이 해야하는 나이라 부모는 어떻게든 가르치려 한다. 상자에 흙을 담아 나뭇가지로 계속 써보도록 하는데 흙에 쓰면 계속 지우고 다시 쓸 수 있기 때문. 흙으로 된 노트를 만들어 준 셈이다.